핀란드를 대표하는 건축가이자 디자이너인 알바 알토(Alvar Aalto)는 그의 아내 아이노 알토(Aino Aalto)와 함께 현대 문화에 대한 인식을 높이고자 디자인 가구 브랜드 아르텍(Artek)을 설립했습니다. 그의 주요 건축 작품으로는 헬싱키 문화 단지 건물(Helskington Cultural Complex Building)과 에스포(Espoo)에 있는 헬싱키 공과 대학(Helskington University of Technology )이 있습니다. 그는 건축 외에도 가구와 직물, 유리공예, 그림과 조각 등 다방면에 폭넓은 관심과 소질을 보였으나 그는 스스로를 예술가라고 지칭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곡목 합판 가구의 발명가로 여겨지는데, 이 분야에서 그는 TON으로 알려진 곡목 가구 공장의 설립자 중 한 명인 게브뤼더 토넷(Gebrüder Thonet)에게 많은 영향을 받았습니다. 그는 나무 의자에 캔틸레버 원리를 처음으로 사용하기도 했습니다. 그의 고향인 핀란드 위베스퀼레(Jyväskylä)의 알바 알토 박물관에는 그의 건축모형과 가구들이 전시 되어 있으며 이 건물 또한 알토가 직접 설계 했습니다. 그의 유명세 덕분에 그의 철학과 스타일은 핀란드의 국경 너머에도 알려지게 되었습니다. 그는 작품들은 비록 핀란드에 한정되어 있으나 그의 건축물을 포함한 다수의 작품들은 스칸디나비아 모더니즘을 총괄하는 것으로 인식되고 있습니다. 그는 부인 아이노 알토와 함께 설계한 파이미오(Paimio) 요양소 내부의 대부분의 가구와 조명 역시 함께 디자인하였으며, 이중 파이미오(Paimio) 의자는 매우 유명해져서 MoMA의 상설 전시품에 등재되었습니다. 애플 스토어에서 사용되는 매우 상징적인 작품으로 바 스툴과 의자의 변형된 형태인 스툴 60이 있습니다.
루이스폴센의 뮤즈인 폴 헤닝센은 코펜하겐 기술학교(Teknisk Schole)에서 수학한 뒤, 1915년부터 1917년까지 Polyteknisk Laeranstalt에서 건축을 공부했습니다. 1920년부터 수많은 저널과 신문에 기고하면서 저널리스트로서 일하기도 하면서 건축가로서 프리랜서로 일하던 중, 코펜하겐의 조명 회사 루이스 폴센(Louis Poulsen)의 조명 디자이너로 활동하면서부터 그의 유명세가 시작 되었습니다. PH 램프는 폴 헤닝센이 화려하지는 않지만 따뜻하고 부드러운 빛을 내는 조명을 개발하는 데 10년을 소비한 산물인데, PH라는 이름으로 1925년 파리에서 열린 국제 예술 박람회(Exposition Internationale des Décoratifs et Industriels Modernes)에서 처음 선보였던 조명은 큰 인기를 얻으며, 이 때를 기점으로 폴 헤닝센의 조명은 전 세계적으로 큰 성공을 거두었습니다. 1967년 그가 사망할 때까지, 폴 헤닝슨은 PH 시리즈로 백 개 이상의 조명을 디자인했는데, 이 조명들은 전구가 가려지고 빛이 아래로 향하게 하여 부드럽고 확산되는 효과를 만들어 내는 개별 요소를 특징으로 하는 현대 조명 디자인의 고전적인 작품입니다. 헤닝센은 도시 생활에서 빛의 중요성을 고려하여, 실내의 심미성은 빛이 어떻게 쓰이느냐에 따라 크게 좌우된다고 보고 디자인을 통해 눈부시기만 한 전깃불을 어떻게 제어할 수 있을지 그 방법에 대해 고민한 인물이었습니다. 폴 헤닝슨의 가장 잘 알려진 디자인 중 하나는 PH 루브르(PH Louvre)인데, 이 램프는 빛을 사방으로 흩뿌리는 13개의 금속 음영을 동심으로 배열한 것이 특징입니다.
야콥센(Jacobsen)은 덴마크 왕립 미술 아카데미(Royal Danish Academy of Fine Arts in Copenhagen)에서 공부하기 전, 석공으로서 훈련을 시작했고 1925년 파리에서 열린 국제 예술 장식 박람회(1925 Exposition Internationale des Arts Decoratifs)에 전시된 의자로 은메달을 받았습니다. 그는 르 코르뷔지에(Le Corbusier), 군나르 아스플룬드(Gunnar Asplund) 및 루트비히 미스 반 데어 로(Ludwig Mies van der Rohe) 등의 영향을 받아 처음부터 기능주의 디자인으로 접근했고, 덴마크에 모더니즘 아이디어를 소개하고 공예를 기반으로 한 디자인의 산업용 가구를 만든 최초의 인물 중 한 명이었습니다. 아르네 야콥센의 중요한 건축 작업 중 첫 번째는 코펜하겐의 벨라비스타 주택 프로젝트(1930-1934)였습니다. 그가 총괄했던 작품 중 가장 잘 알려진 것은 SAS 공항터미널과 로얄 호텔 코펜하겐(Royal Hotel Copenhagen)으로, 그의 우아한 스완체어와 에그체어(1957-1958)와 같은 가구에서부터 직물, 조명, 재떨이 및 식기류에 이르기까지 모든 세부 사항을 직접 디자인 하며 '토탈 디자인'에 대한 아이디어를 제시했습니다. 1960년대의 야콥센의 가장 중요한 작업은 옥스포드의 세인트 캐서린 대학(St. Catherine’s College, Oxford)을 위한 건축 및 인테리어 디자인 계획으로, 로얄 호텔에서의 작업처럼 프로젝트 내 가구 디자인을 포함했습니다. 그의 작업은 오늘날에도 매력적이고 신선하며, 그 매력은 전통적인 스칸디나비아 디자인 및 재료적인 특성을 자유롭고 조각적인 형태로 풀어낸 데 있습니다.
마리오 벨리니는 밀라노 공과대학(Politecnico di Milano)에서 건축을 공부했고, 졸업 후 얼마 지나지 않아 이탈리아의 규모 있는 백화점 체인인 리나센테(La Rinascente)의 디자인 디렉터 자리에 올랐습니다. 1963년, 그는 마르코 로마노(Marco Romano)와 함께 건축디자인 회사를 열었으며 이로 부터 10년 후 밀라노에 스튜디오 벨리니(Studio Bellini)를 설립했습니다. 1963년부터 1991년까지 그는 올리베티(Olivetti)의 수석 디자인 컨설턴트였습니다. Olivetti를 위한 그의 디자인 중 대표작은 밝은 색의 플라스틱과 얇은 고무로 덮인 둥글둥글한 디자인의 Divisumma 계산기와 Praxis 타자기인데요, 그는 매우 독창적인 형태, 광범위한 디자인 아이디어와 기술적인 정교함으로 동시대의 디자이너들의 존경을 받았으며, 그의 가구 디자인은 다양한 스타일과 유기적인 형태, 고급스러운 재료의 독창적인 사용 및 높은 수준의 마감이 특징입니다. 그는 상상력이 풍부한 디자이너였을 뿐만 아니라 1986년부터 1991년까지 도무스 잡지의 편집자로 활동했고, 밀라노 과학위원회(The Scientific Council for the Milan Triennial)의 회원으로도 활동했습니다. 그는 또한 베니스 디자인스쿨(Istituto Superiore del Disegno Industriale(Venice))과 밀라노의 도무스아카데미(Industrial design at the Domus Academy(Milan))의 교수직을 역임하며 후학 양성에도 힘을 쏟았습니다. 벨리니는 카시나(Cassina), 비트라(Vitra), 비앤비이탈리아(B&B Italia), 플로스(Flos), 아르떼미데(Artemide) 등 세계적인 브랜드의 디자이너 및 컨설턴트로 활동하며, 그는 주요작 8개는 콤파스상(Compasso d'Oro Awards)을 포함하여 수많은 디자인상을 수상했습니다.
프랑스의 건축가이자, 장식가, 그리고 2차 세계대전 이후의 산업디자이너인 피에르 귀아리쉬의 디자인은 프랑스의 전통적인 장식 예술에 대한 현대적인 대안을 표준화 하고 최소한의 소재로 직관적인 디자인이 특징입니다. 1926년 파리에서 태어나 1949년까지 Ecole Nationale Supérieure des Arts Decoratifs에서 공부하며 르네 가브리엘의 가르침을 받았고, 졸업 후 그의 교수 Marcel Gascoin의 사무실에서 일하기 시작했습니다. MAI 갤러리에서 전시한 후, 그는 1951년 Airbine사의 가구 시리즈 Prefacto를 디자인 했으며 동일한 해 그는 가구 제조업체 Steiner를 위해 의자 Tonneau를 디자인 했습니다. 그는 1954년부터 그의 디자이너 동료 Joseph-Andre Motte, Michel Mortier와 함께 ARP사를 위해 일했습니다. 1957년 그는 Meurop사의 디자인 총괄직을 맡았으며 그의 우아하고 합리적인 가구 디자인은 큰 사랑을 받았으나 그는 스스로를 가구 디자이너 보다는 주로 건축가로 여기며 1960년대에 가게와 사무실을 위한 많은 개인 주택과 인테리어 디자인을 계획했습니다. 1965년 르네 가브리엘 상을 수상하기도 했습니다.
Cees Braakman
Cesare Joe Colombo
Le Corbusier
Eero Saarinen
Vico Magistretti
Gae Aulenti
George Nelson
핀란드를 대표하는 건축가이자 디자이너인 알바 알토(Alvar Aalto)는 그의 아내 아이노 알토(Aino Aalto)와 함께 현대 문화에 대한 인식을 높이고자 디자인 가구 브랜드 아르텍(Artek)을 설립했습니다. 그의 주요 건축 작품으로는 헬싱키 문화 단지 건물(Helskington Cultural Complex Building)과 에스포(Espoo)에 있는 헬싱키 공과 대학(Helskington University of Technology )이 있습니다. 그는 건축 외에도 가구와 직물, 유리공예, 그림과 조각 등 다방면에 폭넓은 관심과 소질을 보였으나 그는 스스로를 예술가라고 지칭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곡목 합판 가구의 발명가로 여겨지는데, 이 분야에서 그는 TON으로 알려진 곡목 가구 공장의 설립자 중 한 명인 게브뤼더 토넷(Gebrüder Thonet)에게 많은 영향을 받았습니다. 그는 나무 의자에 캔틸레버 원리를 처음으로 사용하기도 했습니다. 그의 고향인 핀란드 위베스퀼레(Jyväskylä)의 알바 알토 박물관에는 그의 건축모형과 가구들이 전시 되어 있으며 이 건물 또한 알토가 직접 설계 했습니다. 그의 유명세 덕분에 그의 철학과 스타일은 핀란드의 국경 너머에도 알려지게 되었습니다. 그는 작품들은 비록 핀란드에 한정되어 있으나 그의 건축물을 포함한 다수의 작품들은 스칸디나비아 모더니즘을 총괄하는 것으로 인식되고 있습니다. 그는 부인 아이노 알토와 함께 설계한 파이미오(Paimio) 요양소 내부의 대부분의 가구와 조명 역시 함께 디자인하였으며, 이중 파이미오(Paimio) 의자는 매우 유명해져서 MoMA의 상설 전시품에 등재되었습니다. 애플 스토어에서 사용되는 매우 상징적인 작품으로 바 스툴과 의자의 변형된 형태인 스툴 60이 있습니다.
루이스폴센의 뮤즈인 폴 헤닝센은 코펜하겐 기술학교(Teknisk Schole)에서 수학한 뒤, 1915년부터 1917년까지 Polyteknisk Laeranstalt에서 건축을 공부했습니다. 1920년부터 수많은 저널과 신문에 기고하면서 저널리스트로서 일하기도 하면서 건축가로서 프리랜서로 일하던 중, 코펜하겐의 조명 회사 루이스 폴센(Louis Poulsen)의 조명 디자이너로 활동하면서부터 그의 유명세가 시작 되었습니다. PH 램프는 폴 헤닝센이 화려하지는 않지만 따뜻하고 부드러운 빛을 내는 조명을 개발하는 데 10년을 소비한 산물인데, PH라는 이름으로 1925년 파리에서 열린 국제 예술 박람회(Exposition Internationale des Décoratifs et Industriels Modernes)에서 처음 선보였던 조명은 큰 인기를 얻으며, 이 때를 기점으로 폴 헤닝센의 조명은 전 세계적으로 큰 성공을 거두었습니다. 1967년 그가 사망할 때까지, 폴 헤닝슨은 PH 시리즈로 백 개 이상의 조명을 디자인했는데, 이 조명들은 전구가 가려지고 빛이 아래로 향하게 하여 부드럽고 확산되는 효과를 만들어 내는 개별 요소를 특징으로 하는 현대 조명 디자인의 고전적인 작품입니다. 헤닝센은 도시 생활에서 빛의 중요성을 고려하여, 실내의 심미성은 빛이 어떻게 쓰이느냐에 따라 크게 좌우된다고 보고 디자인을 통해 눈부시기만 한 전깃불을 어떻게 제어할 수 있을지 그 방법에 대해 고민한 인물이었습니다. 폴 헤닝슨의 가장 잘 알려진 디자인 중 하나는 PH 루브르(PH Louvre)인데, 이 램프는 빛을 사방으로 흩뿌리는 13개의 금속 음영을 동심으로 배열한 것이 특징입니다.
야콥센(Jacobsen)은 덴마크 왕립 미술 아카데미(Royal Danish Academy of Fine Arts in Copenhagen)에서 공부하기 전, 석공으로서 훈련을 시작했고 1925년 파리에서 열린 국제 예술 장식 박람회(1925 Exposition Internationale des Arts Decoratifs)에 전시된 의자로 은메달을 받았습니다. 그는 르 코르뷔지에(Le Corbusier), 군나르 아스플룬드(Gunnar Asplund) 및 루트비히 미스 반 데어 로(Ludwig Mies van der Rohe) 등의 영향을 받아 처음부터 기능주의 디자인으로 접근했고, 덴마크에 모더니즘 아이디어를 소개하고 공예를 기반으로 한 디자인의 산업용 가구를 만든 최초의 인물 중 한 명이었습니다. 아르네 야콥센의 중요한 건축 작업 중 첫 번째는 코펜하겐의 벨라비스타 주택 프로젝트(1930-1934)였습니다. 그가 총괄했던 작품 중 가장 잘 알려진 것은 SAS 공항터미널과 로얄 호텔 코펜하겐(Royal Hotel Copenhagen)으로, 그의 우아한 스완체어와 에그체어(1957-1958)와 같은 가구에서부터 직물, 조명, 재떨이 및 식기류에 이르기까지 모든 세부 사항을 직접 디자인 하며 '토탈 디자인'에 대한 아이디어를 제시했습니다. 1960년대의 야콥센의 가장 중요한 작업은 옥스포드의 세인트 캐서린 대학(St. Catherine’s College, Oxford)을 위한 건축 및 인테리어 디자인 계획으로, 로얄 호텔에서의 작업처럼 프로젝트 내 가구 디자인을 포함했습니다. 그의 작업은 오늘날에도 매력적이고 신선하며, 그 매력은 전통적인 스칸디나비아 디자인 및 재료적인 특성을 자유롭고 조각적인 형태로 풀어낸 데 있습니다.
마리오 벨리니는 밀라노 공과대학(Politecnico di Milano)에서 건축을 공부했고, 졸업 후 얼마 지나지 않아 이탈리아의 규모 있는 백화점 체인인 리나센테(La Rinascente)의 디자인 디렉터 자리에 올랐습니다. 1963년, 그는 마르코 로마노(Marco Romano)와 함께 건축디자인 회사를 열었으며 이로 부터 10년 후 밀라노에 스튜디오 벨리니(Studio Bellini)를 설립했습니다. 1963년부터 1991년까지 그는 올리베티(Olivetti)의 수석 디자인 컨설턴트였습니다. Olivetti를 위한 그의 디자인 중 대표작은 밝은 색의 플라스틱과 얇은 고무로 덮인 둥글둥글한 디자인의 Divisumma 계산기와 Praxis 타자기인데요, 그는 매우 독창적인 형태, 광범위한 디자인 아이디어와 기술적인 정교함으로 동시대의 디자이너들의 존경을 받았으며, 그의 가구 디자인은 다양한 스타일과 유기적인 형태, 고급스러운 재료의 독창적인 사용 및 높은 수준의 마감이 특징입니다. 그는 상상력이 풍부한 디자이너였을 뿐만 아니라 1986년부터 1991년까지 도무스 잡지의 편집자로 활동했고, 밀라노 과학위원회(The Scientific Council for the Milan Triennial)의 회원으로도 활동했습니다. 그는 또한 베니스 디자인스쿨(Istituto Superiore del Disegno Industriale(Venice))과 밀라노의 도무스아카데미(Industrial design at the Domus Academy(Milan))의 교수직을 역임하며 후학 양성에도 힘을 쏟았습니다. 벨리니는 카시나(Cassina), 비트라(Vitra), 비앤비이탈리아(B&B Italia), 플로스(Flos), 아르떼미데(Artemide) 등 세계적인 브랜드의 디자이너 및 컨설턴트로 활동하며, 그는 주요작 8개는 콤파스상(Compasso d'Oro Awards)을 포함하여 수많은 디자인상을 수상했습니다.
프랑스의 건축가이자, 장식가, 그리고 2차 세계대전 이후의 산업디자이너인 피에르 귀아리쉬의 디자인은 프랑스의 전통적인 장식 예술에 대한 현대적인 대안을 표준화 하고 최소한의 소재로 직관적인 디자인이 특징입니다. 1926년 파리에서 태어나 1949년까지 Ecole Nationale Supérieure des Arts Decoratifs에서 공부하며 르네 가브리엘의 가르침을 받았고, 졸업 후 그의 교수 Marcel Gascoin의 사무실에서 일하기 시작했습니다. MAI 갤러리에서 전시한 후, 그는 1951년 Airbine사의 가구 시리즈 Prefacto를 디자인 했으며 동일한 해 그는 가구 제조업체 Steiner를 위해 의자 Tonneau를 디자인 했습니다. 그는 1954년부터 그의 디자이너 동료 Joseph-Andre Motte, Michel Mortier와 함께 ARP사를 위해 일했습니다. 1957년 그는 Meurop사의 디자인 총괄직을 맡았으며 그의 우아하고 합리적인 가구 디자인은 큰 사랑을 받았으나 그는 스스로를 가구 디자이너 보다는 주로 건축가로 여기며 1960년대에 가게와 사무실을 위한 많은 개인 주택과 인테리어 디자인을 계획했습니다. 1965년 르네 가브리엘 상을 수상하기도 했습니다.